2014.03.11 06:36

을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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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난 20대에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과 끝을 모두 맛보았다. 쓴 맛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시고, 시다고 생각하기에는 텁텁하다. 아마도 자신의 그림자를 만질 수 있다면, 아마도 비슷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그 서늘하고 너무나 차가운 금속의 느낌 말이다. 


가장 강렬하고 분명한 관계의 끝은 선명하게 기억된다. 많은 이별노래가 그 증거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분명한 이별이 아니다. "헤어지자" 라는 통보와 함께 간결하게 끝맺는 관계의 끝은 차라리 낫다. 분명하고 확실하니까 마음껏 아파하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면 그만인 것이다. 분명한 사랑의 시작처럼 확실한 사랑의 끝은 어쩌면 많은 이별 중에 가장 나은 이별일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관계의 끝이다. 그것은 끝나기도 전에 알게 되는 '예감'을 시작으로 찾아온다. 그것은 연인들 사이의 이별처럼 확실한 사건과 분명한 하루로 비롯된다기 보다 사소하고 별것아닌 것으로 훅하고 옆구리를 찔러온다. 이별통보야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많지만, 이런 예상조차 못한 끝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물론 연인 사이에서도 이런 사소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의 사랑에 분명한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 다른 관계들의 끝은 "끝"이 있을지도 몰랐는데, 끝이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서늘한 슬픔의 온도를 결정한다. 일기예보도 없이 찾아오는 한파. 쨍쨍한 햇살이 가득한 여름날의 급작스러운 눈. 클라이막스 도중에 등장하는 느닷없는 크레딧. 뭐 이런 뉘앙스.


-


이번에도 나는 친했던 친구들과 같은 방식의 끝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는..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른 척 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느꼈다. 이미 3년 전에 지겹도록 몸서리치게 경험했던 감각이므로 나는 평생 이것을 잊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아 이 관계는 조만간 문을 닫겠구나. 손님의 발길이 끊어진 텅빈 식당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식은 칼국수를 삼키는 느낌이랄까. "여기 곧 망하겠구나" 싶으면서 맛없는 음식을 삼키는 그 느낌이 친구들을 생각하며 든다. 


20대에 맺은 모든 관계들이 그런 식으로 문을 닫는다는 사실에 이제는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결국에는 내가 문제라는 것을. 내가 개새끼고. 내가 나쁜놈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런 자책은 가장 손쉬운 합리화인 것 같아 결론적으로 슬프다. 하지만 누구 탓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관계가 더 많은 시간을 약속하지 못하고 닫아버렸으니, 오 슬프다. 나의 고향은 나 홀로 사는 빈 집이다. 


나는 내가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항상 '을'의 위치였다. 장남. 장녀. 또 장남. 들로 가득한 곳에서 홀로 막내였던 나는 너무 어렸고 그로 인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자라는 것이 내 성장과정이었다. 타고난 예민함과 지루한 머리는 이런 눈치와 함께 나를 '서비스 직종 근무자의 감정노동'을 기본적으로 가르쳤다.그들이 당연하게 결정하고 뱉는 일들에 대해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 나의 감정과 결정을 미루는 것. 그것이 내가 관계를 맺는 기본 방식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결국 나의 이런 '을의 감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갑질'을 받아주게 만드는지 깨달았다. 모든 관계에서 그들을 심각하게 배려하고 존중하다보니, 결과론적으로는 나는 어느새 그들의 결정에 따르고 순응하는 '을'이 되어있었고, 갑질의 횡포와 언설이 심해지다보면 결국에는 싸우다가 서로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나는 너의 을이 아니다'를 외치고 그 관계을 끝맺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나의 배려와 존중에 똑같이 리듬을 맞추었으나, 대부분 결국에는 편하고 단순한 갑의 자리에 앉아 ,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를 증명하거나 "너 갑자기 왜 그래"를 시전하였다. 결국 그들을 갑으로 만든 것은 나였고, 순순히 을의 위치에 서있다가 독립운동을 벌이는 투사로 변신해 싸우는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가장 솔직한 자기고백에 가깝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주 손쉽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갑'이 되었고, 나는 그들의 결정에 따라주는 '을'이 되어있었다. 뭔가 심각하게 이 관계가 기이하다고 느낄 즈음. 그들은 무심했고, 결과론적으로 나의 싸움은 '또 예민하고 진지한 친구의 발작'으로 오인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내가 예민해서도 진지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신경쓰지 않아도 그들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는 내가 그들에게 '무심해도 괜찮아'라는 자격증을 발부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들의 무심함에 날카로워지기 시작한 나는 결국 그 관계를 파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슬픈 것이다. 갑은 을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퇴직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관계의 끝에는 노후연금이 보장되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사랑한만큼의 슬픔 뿐이다. 


-


그들에게 간 날. 나는 여행에서 사온 선물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갔다. 내가 밤10시에 오자, 그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녁 6시에 만나 저녁을 먹고 곧 헤어질 사람들이 '내가 호소한 섭섭함'에 못이겨 나를 부른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명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아주 당연하게 내가 그곳에 온 것에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10분동안 그들이 열중하고 있는 모니터를 훔쳐보다가 가방을 열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들에게는 연락도 오지 않았다. 한때는 돈을 꾸고, 한때는 고민을 털어놓고, "너밖에 없던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한 관계의 울타리안에 갑의 자리에 앉아있다가 문득 한 사람의 마음이 다쳤다는 사실을 잊는다. 선물이 든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결국 이 텅빈 집의 의자가 나의 유일한 객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my life without me. 오랜 여행을 떠나고 난 뒤에 느끼는 실감. 나 없이도 세상은 잘 굴러간다는 것. 그들이 잘 굴러가고 있는 동안, 나는 문득 사라질 것이고 그 텅 빈 자리에는 묘비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왜 나의 모든 글은 누군가가 떠나고 난 뒤에 남겨진 묘비명이 되는 것일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무덤이 되는 것일까. 



  • 나타샹 2014.03.12 01:00
    골디 화이팅!! 넌 을이 아니야. 네가 을이라고 생각할 뿐.
  • imi 2014.03.12 20:09
    ㅠㅡㅠ 골디였다니 저만 여태 몰랐네요. 왠지 더 반갑네요
  • 21 2014.03.12 07:41

    음.. 사실 친구 사이에 무심한 쪽, 살뜰하게 잘 챙기고 배려하는 쪽의 구분은 있을지라도 갑과 을로 구분한다는 게 납득이 안되긴 하다. 물론 네가 그걸 혼동할 만큼 둔하고 멍청한 인간은 아니지만. 남자들 세계에선 친구사이에서도 그런 권력관계가 이뤄지는 건가.
    난 네게 탁월하게 훌륭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알아보고 다가갈 운 좋은 사람도 몇 안될 거라고 생각해. 결점이 장점만큼이나 뚜렷하지만 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결점마저 덮을 정도로 너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난 니가 그간 운이 더럽게 없었던 거고, 앞으로도 고난이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언젠간 전에 얘기했던 ㅅㅎㅈ씨 같은 사려 깊고 따뜻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안정을 찾게 될 것 같아. 너무 상심하지 마라.

  • 나타샹 2014.03.13 00:47
    방송하기는 하니? 내가 들어갈땐 늘 안하네
    너랑 대화하고 싶다요
  • 롤린스 2014.03.13 00:53

    조만간 재개할 예정 

  • 나타샹 2014.03.13 01:00
    지금 안자고 살아있으면 나랑 대화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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