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1 08:29

사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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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낼 생각은 당연히 없다. 그러나, 사표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 자체가 나름 충격이긴 하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정규직이 된지 3년 정도 되었다. 인천공항처럼 국가에서 쇼한다고 알아서 바꿔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기에, 아 세상이 힘들긴 해도 결국 오래도록 버티면 그래도 되는구나 싶어서 기뻤고, 열심히 살아봐야지, 이런 마음도 들었다. 긴 터널 끝을 나와 나도 이제 햇빛드는 세상에서 사는구나 하는 기대감과 함께. (실제로 진짜 반지하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 컨디션이 안좋아지면 그 당시 곰팡이낀 화장실이 꿈에 나오곤 하는데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헛구역질이 날 정도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에 크게 변화는 없다. 일은, 당연히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고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나름 재미가 있다. 나는 겉보기엔 드러나지 않는가 몰라도 내면에 열등감이 어마어마한 인간이라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 쓸모 있다는 느낌을 못받을까 늘 전전긍긍하는 면이 있는데 일하면서 다행히 그런 열등감이 해소되는 측면이 있어 왔기에 일반 회사원과는 달리 꽤 일을 즐기면서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뭔가 성장 같은 것을 했다고도 생각하고.


근데, 요즘 들어 느끼게 되는 것은, 사회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독려해서 오래 버티도록 해주는 곳이 아니라 쪼옥 빨아먹고 버리고 다른 에너지를 찾아나서는, 그런 속성이 있는 거 같다. 뭐랄까, 노가리와 총알오징어를 마구 잡아 먹으면서 명태와 오징어의 씨를 말리는 그런 느낌하고 비슷하달까. 성체가 되어야 알도 낳고 그게 부화해서 자라고 하면서 생태계가 돌아갈텐데, 그럴 여가가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토요일 아침에도 핸드폰이 막 울리네. 또다시 어지러움이 몰려온다.


회사 일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 못했던 거 같다. 비정규직일 때는 오히려 일을 좀 하려고 치면 꽤나 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도 있거든. 누군가 너무 열심히하면 그 사람에게 보상해야할 거 같은 부담이 고용자에게는 생길테니까. 근데 그 울타리안에 들어오고 나면 반대가 되더라. 조금의 의향만 내비치면 그냥 모든 일이 그 사람에게 다 폭탄처럼 떨어진다. 웃는 얼굴, 나이스한 격려 코멘트, 그러다가 적당히 긴장감을 주는 인사협박들과 함께 (흔히 술자리에서 그 협박이 나오는 것은 다음날 그 나이스한 사람이 내가 어제 꽐라가 되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난다며 화사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멀쩡히 잘 살아가는 사람 모두는 볼품없는 개미떼처럼 보일지 모르나 정작 꽤나 노련하고 기술적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다루는 게 정치인이란 직업이니 그들은 당연히 빠꼼한 인간들일 수 밖에 없고, 멘탈이 남다르게 단단할 수 밖에 없고, 이해관계를 맡는 후각, 그것을 획득하는 사냥 기술이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되게 뛰어날 수 밖에 없다. 안철수고 윤석렬이고 나도 나름 사회에서 좀 나갔는데 싶던 사람들이 인기도를 바탕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지만 개박살 나는게 다 이유가 있다. 보통 사람의 사회도 정치 고단수가 그렇게 많은데... 정치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각설하고, 어쩌다보니 야근과 주말 근무가 아무렇지 않게 된 상황에 처해져 버렸다. 특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진짜 이건 거의 미칠지경인 지금의 내가 손을 놓으면 그냥 파토가 나버리는 일인데, 이 정도 규모의 일을 한 사람의 고공분투에 그냥 올인해서 맡기고 플랜B 없이 가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근데 나는 왜 파토를 못내는가. 이거 파토를 내면 나는 그냥 이 사회에서 매장이 되니까. 놀랍지 않나. 이렇게 일을 비정상적으로 맡겼는데 정작 그 일이 빵꾸가 나면 일을 지시한 사람이 아닌, 죽을 정도로 일을 받아내다가 무너진 사람이 쓰레기에 책임감 없는 나쁜 놈이 되는 구조.


아 이래서 미친 듯이 사람들이 출세에 목을 매는 건가, 아 이래서 사람들이 조그마한 힘이 생기면 남들에게 큰소리치고, 심해지면 소위 갑질이라 불리는 깽판을 치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사이 내 아래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생겼는데 나를 무지하게 혐오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왜 저렇게까지 하며 살까, 그리고 왜 그걸 우리한테까지 영향을 주나 그런 맘이 들겠지. 물론 내 눈에 그들은 불안정한 미래를 개선할 의지없이 초라한 워라밸을 누리기 극급한 한심한 존재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지금 내 생각일 뿐 그들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약 한 달을 지금과 같은 상태를 더 버텨야 일단 한 고비를 넘기는데, 가능할까. 숨이 콱 막힌다. 문제는 그 고비를 넘겨도 계속해서 이딴 식의 일의 파도가 계속 넘어올 거 같다는 것이다. 진짜 미칠 거 같은 마음을 억누르고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데 어제 거기에 살포시 일을 하나 더 얹어주는 선임분을 보고 진짜 쌍욕이 거의 앞니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그들은 인간 돌탑쌓기 뭐 그런 걸 하고 있는 건가. 오오 요정도 더 쌓았는데도 아직 안무너지네. 하나 더 올려볼까, 뭐 그런 잔재미가 있는 건가? 카이지 재애그룹이 인간을 직접 도박게임에 활용하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지금 나에게 하나의 작은 돌을 더 쌓아주신 그 분은 내가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기도 하다. 그게 참 고마워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나한테 남다른 분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는데, 그 감정이 자꾸 옅어지네. 딴에는 위로랍시고 술이나 한잔하자며 연락을 하는데 지금 시간 쫓겨 죽겠는데 무슨 놈의 술자리인가 싶어 짜증에 얹그제는 연락도 살포시 씹었다.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3년만에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는 내가 몹쓸 인간인건가? 내가 간사하고 내 이해관계에 따라 들쭉날쭉해지는 인간인가, 그런 생각도 참으로 많이 하고 산다 실제로. 


가끔 네이버 영화에 무료로 풀리는 영화들 하나씩 보는데 어젠 진짜 머리도 안굴러가고 그래서 저녁 먹고 한 편을 땡겼다. [해빙]이라고 조진웅이 나오는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더더욱 지금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반전이 들어간 영화라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상 이야기를 못하겠음. 단 중반까지는 뭐 이딴 영화가 다 있지 싶다가, 중반 이후에는 오 나름 구성을 잘 했네 싶다가, 다시 끝에는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까지 비비 꼬아버릴 필요가 있었나 싶은, 개인적 감상평). 그냥 내가 이상하면 좋겠다. 이상해도 좋으니, 이 압박감을 좀 어서 벗어던졌으면 좋겠다.


결론은, 사표를 쓰지는 않을 것이겠지만, 정말 사표를 절실하게 쓰고 싶은 생각이 나는, 그래서 참 서글픈 나날이다. 나도 결국 노오력이 부족한,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인가 보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정상인 것인지 사회의 가스라이팅의 흔적인 것인지, 판단을 못하겠다. 정작 나는 많은 부분이 노오력이 아니라 노력이다, 할 만 하다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뭔가 나의 오래된 생각을 부정해야할 거 같다 싶으니, 슬프다.

  • HIPHOP=SEX 2021.09.11 20:04
    마광수 曰

    "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하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다. "
  • objet 2021.09.13 00:35
    회사에서 상황은 뭔가 저랑 비슷하네요. ㅎㅎ
  • 산책비 2021.09.13 13:18
    몸과 맘이 너무 상처 나지는 않을 정도이시길..
  • imi 2021.09.14 23:10
    글 좋네요!!
    저는 사직 예정자입니다.
    사직하면 근황 올리겠습니다 ㅎㅎ ㅠㅠ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 Fomalhaut 2021.09.25 11:08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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